Ⅱ. 창녕 조씨 득성 경위와 시조위상검증
1. 창녕 조씨 족보분석
창녕 조씨 족보에 대한 기록은 하강공(荷江公) 조석여(曺錫輿18131889)가 쓰신 창녕 조씨 족보(昌寧曺氏族譜) 경진보(庚辰譜) 서문(序文)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집안의 족보도 주 부자 오세의 법2)을 모방하여 처음으로 인종(仁宗) ․ 명종(明宗) 때부터 종인(宗人)인 하윤(夏尹) ․ 진영(震英) ․ 명기(命基) ․장호공(莊胡公) 윤손(潤孫) ․ 경승(景承)이 사보(私譜)가 있었는데 이것을 구보(舊譜)라 한다. 그리고 판관(判官) 중의(仲義)는 광묘(光廟) 때 사람으로 가보(家譜)가 있었는데 이것을 판관보(判官譜)라 하고, 남명공(南冥公) 휘(諱) 식(植)은 명종 때 사람으로 족보 가 있었는데 이것을 남명보(南冥譜)라 하며, 매계공(梅溪公) 휘 위(偉)는 연산조(燕 山朝) 때 사람으로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을 매계보(梅溪譜)라 하고, 참판(參判) 휘 탁(倬)은 선조(宣廟) 때 사람으로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을 참판보(參判譜)라 하며, 참판의 손자 군위현감(軍威縣監) 휘 실구(實久)가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이 군위보 (軍威譜)이고, 인조(仁祖) 때에 회곡공(晦谷公)이 족보가 있었는데 이것이 회곡보(晦 谷譜)이며, 숙종(肅宗) 정묘년(丁卯年)에 담양공(潭陽公)이 청도(淸道)의 지방관(地方 官)으로 나가서 족인(族人) 상사군(上舍君) 건(建)과 면주(冕周)를 시켜서 여러 책을 모아 편집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계유보(癸酉譜)이고, 영조(英祖) 갑자년(甲子年)에 서주공(西州公)이 담운공(澹雲公)과 편마(編摩)를 의결하고 또 명백씨(命百氏)와 자의(諮議) 임씨(霖氏)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잇달아 세상을 떠나시고 자의만이 홀로 살아 계셨다. 그래서 명억씨(命億氏) ․ 윤적씨(允迪氏) ․ 회진씨(晦振氏)와 함께 의논하여 그 역사를 감독하였는데 24년만인 정해년(丁亥年)에 비로소 완성을 알렸으니 이것이 정해보이다. 이렇게 하여 앞뒤의 족보가 모두 9본이다.”3)
라고 하여, 조선초기부터 정해보 발간까지의 족보를 구본으로 명시하였으며, 거기에다 정해보 이후에 발간된 경진보(庚辰譜) ․ 신해보(辛亥譜) ․ 갑자보(甲子譜) 3보를 추가하면 모두 12본이다. 이 12本의 족보를 중심으로 창녕 조씨 득성 경위와 시조위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가. 족보의 종류 (창녕 조씨 족보의 근간이 되는 사보(私譜), 가보(家譜), 족보)
① 《구보(舊譜)》 (조하윤공(曺夏尹公), 조진영공(曺震英公), 조명기공(曺命基公), 장호공(莊胡公) 조윤손(曺潤孫), 조경승공(曺景承公)의 사보)
② 《판관보(判官譜)》 (판관공 조중의의 가보 (1400년대 중반))
③ 《매계보(梅溪譜)》 (매계공 조 위(曺偉1454~1503)의 족보)
④ 《남명보(南冥譜)》 (남명공 조 식(曺植1501~1572)의 족보)
⑤ 《참판보(參判譜)》 (참판공 조 탁(曺倬1552~1621)의 족보)
⑥ 《군위보(軍威譜)》 (현감공 조실구(曺實久1591~1658)의 족보)
⑦ 《회곡보(晦谷譜)》 (회곡공 조한영(曺漢英1608~1670)의 족보)
⑧ 《계유보(癸酉譜)》 정묘년(丁卯年1687)에 담양공(潭陽公) 조전주(曺殿周1640~1696)가 청도 지방관(淸道地方官)으로 나가 상사공(上舍公) 조건(曺建1641~1698) 과 병절교위공(秉節校尉公) 조면주(曺冕周1632~1698)를 시켜 여러 본의 족보를 모아 무진년(戊辰年1688)에 편집을 마쳤으나 담양공의 체직(遞職)으로 미쳐 판각하지 못한 것을 계유년(癸酉年1693)에 해서병마절도사공(海西兵馬節度使公) 조정량(曺廷亮1652~1693)에 의해 간행.
⑨ 《정해보(丁亥譜)》 갑자년(甲子年1744)에 서주공(西州公) 조하망(曺夏望 16821747)과 담운공(澹雲公) 조명교(曺命敎1687~1753)가 편집을 의결하고 또 통덕랑공(通德郞公) 조명백(曺命百1717~1756)과 자의공(諮議公) 조임(曺霖1711~1790)에게 명하여 그 역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중도에 잇달아 세상을 떠나고 자의공만 생존하여 다시 현감공(縣監公) 조명억(曺命億17201774) ․ 현감공 조윤적(曺允迪 1707~1772) ․ 감찰공(監察公) 조회진(曺晦振1738~1799)과 함께 논의 감독하여 정해년(1767)에 간행. 참고로 편집을 의결하고 보역(譜役)을 주관하며 감독하신 분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서주공은 담운공에게 생가(生家)로는 종숙부(從叔父)가 되고, 양가(養家)로는 재종숙부(再從叔父)가 되시며, 통덕랑공과 현감공 조명억은 서주공 의 자제이시고, 자의공은 매계공의 8세손(世孫)이시고, 현감공 조윤적은 담운공의 종질(從姪)이 되시며, 감찰공은 담운공의 손자이시다.
⑩ 《경진보(庚辰譜)》 갑술년(甲戌年1874)에 연암공(烟巖公) 조석우(曺錫雨1810~1878)가 8도(道)의 종중에 발의하여 편집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의 중씨(仲氏)인 하강공(荷江公) 조석여(曺錫輿)가 계승하여 경진년(庚辰年1880)에 간행.
⑪ 《신해보(辛亥譜)》 신해년(辛亥年1911)에 관찰사공(觀察使公) 조시영(曺始永 (1843~1912)이 현령공(縣令公) 조두환(曺斗煥1848~1915)과 심력을 합하고 조두영공(曺斗永公)을 시켜 각처의 종족에게 통고하여 편집 간행.
⑫ 《갑자보(甲子譜)》 갑자년(甲子年1924)에 조병수공(曺秉洙公)이 제족과 상의하 여 조석하공(曺錫河公) ․ 조병선공(曺秉繕公)과 함께 편집 간행.
나. 족보에 기록된 시조의 출생과 득성 경위 및 위상 분석
창녕 조씨 족보의 근간이 되는 족보는 모두 12본이다. 이 가운데 시조의 위상과 출생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는 본은 《구보》․《판관보》․《참판보》․《군 위보》․《회곡보》 등 5본이며, 기록되어 있는 본은 《매계보》․《남명보》․ 《계유보》․《정해보》․《경진보》․《신해보》․《갑자보》 등 7본이다. 시조 위상과 출생에 대한 족보별 기록 내용을 살펴보면,
① 《매계보》의 『사실(事實)』이란 제목 아래에,
“비조(鼻祖)는 신라 부마(新羅駙馬)이시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으로 성(姓)은 조씨(曺氏)이고 휘(諱)는 계룡(繼龍)이시며 관직(官職)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4).”
하였으며, 또 기록하기를,
“신라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휘 예향(禮香)이 청룡질(靑龍疾)을 얻어 화왕산(火王山)에 있는 용담(龍潭)에서 목욕을 하다가 용자(龍子 ) 옥결(玉玦)과 만나 계룡을 낳게 되었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字)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성을 曺라고 하였다5).”
하였고, 또 속전(俗傳)에,
“조씨 시조의 어머니 휘 예향이 태어나면서부터 복병(腹病)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의 용지(龍池)가 매우 영험(靈驗)이 있으니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하면 반드시 효험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의 말대로 길일을 가려서 용지로 올라가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雲霧)가 일어 대낮이 캄캄해지면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하였으나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었다. 이윽고 운무가 걷히면서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때부터 병은 낫고 태기(胎氣)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꿈에 한 장부가 나타나서 이르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은 옥결인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잘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될 것이오. 그리고 자손이 만대로 번창할 것이오.’ 하였다. 그의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이 그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조계룡(曺繼龍)이란 성명(姓名)을 내리고 장성함에 이르러서는 진평왕(眞平王)의 사위가 되고 창성부원군에 封해졌으니 이 분이 사실 조씨의 시조이다.
전해오는 말이 비록 정경(正經)과 대도(大道)에 벗어나기는 하지만 <주(周)나라 시조 후직(后稷)은 그의 어머니> 강원(姜嫄)이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감응되어 탄생하였다는 것과,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그의 어머니> 유온(劉媼)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교룡(蛟龍)과 상교(相交)하여 탄생하였다는 것이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알영 왕비(閼英王妃)가 알영정변(閼英井邊)에서 계룡(鷄龍)의 좌협(左脇)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이런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간에 전해지는 것인 즉 자손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들은 바를 간추려 적어서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일 뿐 그 선계(先系)를 신성(神聖)하게 하여 힘써 과장(誇張) 하거나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6).“ 하였으며,
② 《남명가첩(南冥家牒)》에는,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여서(女婿)인 옥결은 바로 창녕 화왕산성의 대지(大池) 신룡(神龍)의 아들이며, 그의 아들 조계룡은 진평왕의 여서가 되었다7).” 하였고,
③ 《계유보(癸酉譜)》의 『사실(事實)』이란 제목 아래에는, “비조(鼻祖)는 신라 부마이시고 창성부원군으로 성은 조씨이고 휘는 계룡이시며 관직은 태사에 이르렀다8).” 하였으며, 또 기록하기를,
“조 매계가첩을 살펴보니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씨가 청룡질을 얻어 화왕산 용담(龍潭)에서 목욕하다가 신룡자(神龍子) 옥결과 서로 만나 繼龍을 낳았는데, 겨드랑이 밑에 조자(曹字)가 있으므로 인해서 성을 조(曹)라 하였다.” 하였으며, 또 속전에,
“시조 어머니 예향씨가 태어나면서 복병이 있어 온갖 약으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화왕산의 못은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와 오래전부터 신령하고 특이함이 드러났으니 만약 그 못에 재계 목욕하고 깨끗이 하여 기도하면 응당 효험을 볼 것이오.’ 하므로, 그 말대로 날을 가려 못에 올라가서 목욕하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운무가 끼어 캄캄해지면서 시조 어머니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랐었다. 얼마 안 되어 운무가 개이자 저절로 못 가운데서 솟구쳐 나왔다. 이 뒤로 병은 낫고 배가 불러오는 것이 임신한 조짐이더니 마침내 남자를 낳았다. 꿈에 한 장부가 와서 고하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시오? 이름은 옥결이고 그가 바로 나요. 잘 보호하고 양육하면 크게는 공후가 될 것이고 적어도 경상은 잃지 않을 것이며, 자손이 만대로 쇠퇴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아버지 한림학사 이광옥이 그 연유를 왕에게 알려 조(曹)라는 성과 계룡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 받았다. 장성함에 이르러 진평왕의 여서가 되고 창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니 이분이 실제로 시조가 된다. 비록 정경에 벗어나는 말이지만 <주나라 시조 후직은 그의 어머니> 강원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가다가 감응되어 탄생하였다는 것과, <한나라 고조 유방은 그의 어머니> 유온이 천둥치고 비 내리는 큰 못가에서 교룡과 상교하여 탄생하였다는 것이며, 여조(麗祖)9)의 알영 왕비는 알영정변에서 계룡(鷄龍)의 좌협으로부터 탄생하였다는 이야기는 이런 이치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전해지는 것인즉 자손된 자가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들은 바를 간추려 적어 후세 사람에게 알게 하려는 것일 뿐 그 선계를 신성하게 하여 힘써 과장 하거나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10).“ 舊譜에서 나왔다. 하였다.《매계보》의 『사실』을 본래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상당 부분 윤색이 가해진 것을 원문 대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남명 가첩》에 기재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계유보》 본문 서두 에, “조계룡 신라 진평왕 여서이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은 태사에 이르 렀다11).” 하였으며,
④ 《정해보》에는 《계유보》의 사실(事實)을 그대로 옮겨 記錄하면서 속전(俗傳)은 《매계보》의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다. 그리고 창녕 조씨 족보 권지일(卷之一)에, “시조 조계룡 신라 진평왕의 여서이다.
○《계유보》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사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신라의 관제를 상고하면 태사 등의 官 직 이름이 없으니 지금 고찰할 수 없다. ○화순에 살고 있는 후손 선행의 사보에 ‘<시조의> 묘소가 경주 초제 신좌의 터에 있다.’ 하였는데, 영조 무진년 (1748)에 과연 찾았다. 경주부의 북쪽 50리 쯤 되는 초제에 상하장(上下葬)이 있었음으로 봉축(封築)을 고쳤는데 좌향과 지명이 꼭 들어맞았고 토인들도 지금까지 조씨의 분산(墳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끝내 문자가 적힌 증표를 찾지 못하였으니 다시 참고하는 것이 타당하다12).” 하였고,
⑤ 《경진보》에는 《계유보》사실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였으며 창녕 조씨 족보 수편(首編) 권지일상(卷之一上) 선계(先系)에, “시조 조계룡 신라 진평왕 여서이다. 계유보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이 태사이다.’ 하였는데, 신라 관제를 살펴보면 태사가 없으니 지금 상고할 수 없다. 화순의 후손 선행(善行)의 사보(私譜)에 ‘묘소가 경주(慶州) 신좌(辛坐) 터 에 있다.’ 하였는데, 영종(英宗) 무진년(戊辰年)에 경주부의 북쪽 50리 쯤 되는 초제에 상하장이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찾아 봉역을 개수하였으나, 묘지나 묘갈의 징험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별도로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는데, 대제학 홍양호가 비명을 짓고, 후손 판서 윤대가 글씨를 썼다13).” 하여, 창녕 조씨 시조묘단비문의 글씨를 동포공(東浦公) 조윤대(曺允大1748~1813)가 쓰셨다고 기록하였으며,
⑥ 《신해보》에는 경진보》의 사실과 창녕 조씨 족보 수편 권지일상 선계내용을 그대로 옮겨다 기록하였고,
⑦ 《갑자보》에는《경진보》의 사실과 창녕 조씨 족보 수편 권지일상 선계내용을 그대로 옮겼는데, 단지 창녕 조씨 족보 권지천(卷之天) 시조 조계룡 <주 (註)> 끝에,
“별도로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는데, 대제학 홍양호가 비명을 짓고 후손 판 서 봉진이 글씨를 썼다14).”
하여, 시조묘단비의 글씨는 신암공(愼庵公) 조봉진(曺鳳振1777~1838)이 쓰셨다고 記錄되어 있는데, 비석에는 신암공이 쓰신 것으로 새겨져 있으며, 신암공은 동포공의 長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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